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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邊東明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27호
발행연도
2007.5
수록면
9 - 43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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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신석기시기부터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돌산도에 방답진이 설치된 것은 조선 중종대였다. 당시 돌산도는 공문서상의 무인도로서 행정적인 공백지대였다. 돌산도 개간을 둘러싼 성종대의 논의에서 알 수가 있는 일이었다.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자 空島政策으로 돌산현이 육지로 옮겨간 때문이었다. 돌산진이 돌산도가 아닌 여수반도에 위치하게 된 것도 그에 따른 일이었다. 돌산현이 寓居한 지역에 설치된 수군진이다 보니 돌산도와 무관한 곳임에도 돌산진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그처럼 무인도이던 돌산도에 방답진이 설치되기에 이른 데에는 세 가지 정도의 요인이 작용하였다. 첫째, 여수반도에 자리한 돌산진의 효용성을 둘러싸고 문제가 제기되었다. 주위의 수군진과 거리가 너무 가까운 데다, 왜구를 퇴치하기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은 위치라는 점 때문이었다. 둘째, 돌산도가 왜구의 주요 통로로서 해로상의 요충이라는 점이 부각되었다. 내륙 쪽으로 들어가 해로와 다소 떨어져 위치한 돌산진에 비해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서, 돌산도가 새로운 수군진의 유력한 후보지로 떠오르는 배경이 되었다. 셋째, 그에 더하여 돌산도의 넓고 비옥한 농토를 개간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섬 안의 농지를 개간하자면, 왜구의 잦은 출몰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랜 논의 끝에 육지의 돌산만호진을 권관진으로 격하시키는 것과 함께 돌산도에는 새로 이 방답첨사진을 창설하기로 방침이 결정되었다. 중종 17년(1522) 무렵이었다.
방답진은 전라좌수영 휘하의 蛇渡鎭管에 소속된 수군진이었다. 巨鎭이었음에도 소속 諸鎭을 거느리며 鎭管을 지휘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諸鎭의 하나와 같은 취급을 받은 첨사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에서는 사도첨사와 대등하거나 혹은 서열에서 앞서기도 하였다. 봄ㆍ가을의 훈련 편제에서나 혹은 무장의 수준에서는 서로 비등하였으며,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의 인수인계나 혹은 風和ㆍ風高期의 防戍 및 포폄 시의 열거 순서에서는 방답첨사의 서열이 사도첨사를 도리어 앞서는 게 보통이었다. 그리하여 평시는 물론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에 전라좌수군을 구성하는 주요 수군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방답진 첨사의 휘하에는 대략 500명에서 700명가량의 軍官ㆍ人吏를 포함한 수군이 배속되었다. 그들을 지휘하여 두 척씩의 戰船ㆍ兵船과 4척의 挾船을 운영하는 편제였다. 관아 건물이 즐비한 水軍鎭城과 그 주위에는 공문 서상 170호가 거주하였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稅役의 수취와 같은 대민 행정업무의 비중이 커지면서, 군사는 대개 문서상으로만 존재할 뿐이었고 전함은 파손된 채 방치되기 일쑤였다. 연해안과 도서지역의 경제ㆍ사회적인 변화 발전을 반영한 결과라고는 하지만, 해상에서의 외적방어라는 본연의 업무를 소홀히 하도록 이끈 잘못된 정책이 빚어낸 결과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突山島 防踏鎭의 설치
3. 全羅左水營과 防踏鎭
4. 防踏鎭의 편제와 시설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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