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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갑동 (대전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인물사연구회 한국인물사연구 한국인물사연구 제11호
발행연도
2009.3
수록면
119 - 155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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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은 29명의 후비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 중 제1비가 정주 출신의 신혜왕후 유씨였다. 그런데 貞州란 지명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던 궁예 통치기에 생겨났다. 수도를 송악에 정하고 있던 궁예에게 귀순해와 貞州가 된 것이었다. 정주는 왕건의 근거지인 개성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해안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요건 때문에 태봉이나 고려의 海軍基地 역할을 하였다. 주로 여기서 전함을 수리하였던 것이다. 또 이것을 명당으로 지적한 道詵의 영향 때문에 일종의 離宮인 長源亭이 이곳에 건설되었다. 神祠도 많이 설치되어 제사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궁예 통치기에 왕건은 903년 장군의 신분으로 錦城郡으로 출정하기에 앞서 정주에 들렀다. 이때 왕건은 유씨 부인의 덕성스런 용모와 장자 집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집에 묵으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27세(만 26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바쁜 일정과 출정 등으로 잊고 있다가 909년 다시 덕진포 전투에 앞서 정주에서 전함을 수리할 때 유씨 부인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여승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감동하여 정식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왕건의 부인이 된 神惠王后 柳氏는 궁예 말기의 혼란 속에서 홍유를 비롯한 4명의 장군이 왕건을 추대하자 이 혁명을 적극 도왔다. 망설이고 있던 왕건을 天命과 大義로 설득하여 혁명을 단행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혁명이 성공함으로써 그는 고려의 개국에 1등 공신 못지 않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1부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졌던 것이다. 이후에도 그는 태조 왕건을 충실하게 내조하여 태조 16년 後唐의 明宗에 의해 河東郡夫人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후손이 없었다. 이에 정주 유씨 가문에서는 柳德英의 딸을 다시 왕건의 후비로 들여 가문의 번영을 꾀하였다. 그들의 희망대로 貞德王后의 후손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곧 고려의 6대 왕 成宗이었다. 성종은 정덕왕후의 딸인 宣義王后의 아들이었다. 목종이나 현종도 성종의 조카였다. 따라서 혜종, 정종만 제외하고 적어도 현종대까지 貞州 柳氏는 그 가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이 가문에서는 柳昭 - 柳洪 - 柳仁著 등을 배출하면서 영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3대는 모두 配享功臣이 되어 각각 德宗室, 宣宗室, 睿宗室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다. 특히 유홍의 딸은 숙종의 왕비인 明懿太店가 되어 가문의 기둥이 되었다. 그러나 유인저 대에 이르러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가세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목차

【국문요약】
Ⅰ. 머리말
Ⅱ. 貞州의 지리적 여건
Ⅲ. 王妃 책봉 과정
Ⅳ. 神惠王后의 역할
Ⅴ. 貞州 柳氏의 동향
Ⅵ.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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