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은일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70
발행연도
2013.6
수록면
349 - 387 (39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우선 궁예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부터 밝혀보았다. 『三國史記』 궁예전에 의하면 궁예는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어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某王으로부터 죽음을 당할 처지에 놓여있었다는 기록은 이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는 궁예를 죽이려고 했던 왕이 누구인가를 찾아낸다면 궁예의 아버지를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밝혀보기 위해 궁예를 죽이러 갔었던 中使에 주목하였다. 중사는 中使省의 관리였으므로 이 관부가 존재했던 시기를 알아내면 궁예를 죽이려 했던 왕의 실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중사성이란 관부의 존재시기를 살펴본 결과 경문왕 즉위 초였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궁예를 죽이려 했던 왕은 경문왕이었다. 경문왕이 궁예를 죽이려 했던 것은 그가 경문왕의 왕위를 위태롭게 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궁예가 경문왕의 친자였다면 그의 왕위를 위태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왕권의 안전판 역할을 했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궁예는 경문왕의 아들이 될 수 없었다.
다음으로 궁예의 출생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헌안왕은 문성왕의 숙부로서 왕위에 올랐다. 문성왕에게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정계에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계명의 지원 때문이었다. 계명이 헌안왕의 왕위계승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헌안왕 다음 왕위를 자신에게 담보하겠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헌안왕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자신의 직계로 왕통을 이으려고 모색하였다. 그것은 헌안왕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를 떠받들고 있었던 균정계가 더욱 절실하였다. 궁예는 이러한 과정에서 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궁예의 모계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다. 헌안왕은 자신의 왕통을 존속시키려는 욕구가 강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왕위에 오를 때 다음 왕권에 대한 계명과의 합의 사항이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헌안왕은 계명측을 견제할 수 있는 계파와 통혼을 통해 직계 왕위계승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당시 중앙에는 그를 지원할 계파가 없었다. 중앙정계를 이미 계명측에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헌안왕은 지방의 정치세력에서 그것을 찾고자 했다. 지방에는 중앙에서 낙향한 진골귀족들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김인문 직계로서 김주원계 일파는 각 지방에서 黨與를 이루며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헌안왕은 이를 주목하였고 곧 김주원계였던 선승 체징을 매개로 하여 김주원계와 결연을 성사시키려 했다. 체징도 헌안왕의 그러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헌안왕은 김주원계의 여식을 후궁으로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궁예의 父系
Ⅲ. 궁예의 출생배경
Ⅳ. 궁예의 母系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9)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4-910-002963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