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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진철 (조선대학교)
저널정보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한국민족문화 한국민족문화 제49호
발행연도
2013.11
수록면
229 - 269 (41page)
DOI
10.15299/jk.2013.11.49.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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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특히 19세기 세도정치기 지방 양반들 특히 재지사족들의 사회적 위상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었다. 이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양반’이라는 신분적 우위는 관직에의 접근성이 약해짐에 따라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지방 양반으로서의 향촌사회 지배력은 ‘수령-이?향 지배체제’의 확립과 ‘鄕品’과 ‘新鄕’ 등의 도전으로 분화되고 약화되었다. 이렇듯 약화된 위상 속에서 재지사족들은 일반 농민과 함께 또 다른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19세기 재지사족의 위상 변화양상과 그들의 권익 수호 방식을 살펴보았다. 특히 1850년 전라도 寶城에서 발생한 ‘庚戌事件’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사건은 전라도 보성 지방의 재지사족들이 수령의 勸分에 대항하여 일으킨 집단 반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재지사족들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지방 양반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자원들을 동원할 수 있었고 실제 동원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科擧 합격자 분석을 통해 보성 지방 사족의 실태에 접근해 보았다. 조선시대 양반이 신분을 획득하고 지배집단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 보성 거주자로 문과에 급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또한 사마시 입격률도 그리 높지 않았다. 이는 당시 지방 출신 사족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기가 매우 어려웠으며, 향촌에서의 사회적 지위 유지에 유리한 사마시 입격도 어려웠던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이 당시 재지사족의 현실적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지사족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경술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세기 수령권의 권분을 통한 수탈 대상에서 사족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이에 사족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우선은 鄕會와 呈訴와 같은 합법적 방법을 이용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였다. 그 결과 군수는 처벌받고 사족들은 환포납부를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던 사족인 宋亨純家에서는 이후에도 10여 년간 계속해서 呈訴등을 통한 권리 구제 활동을 전개하였다. 더 나아가 『庚戌錄』이라는 기록을 통해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그 책임을 향리들에게 전가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19세기 재지사족들의 위상은 나날이 약해지고 있었다. 사족들 사이의 연대도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 분열되었고, 일반 백성들의 지지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조선의 재지사족들은 약화된 사회적 위상 속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19세기 재지사족의 위상 변화
3. 권익 수호를 위한 재지사족의 대응 방식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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