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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형우 (연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0호
발행연도
2014.03
수록면
191 - 218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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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 최초의 정주 개신교 선교사 알렌이 내한한지 130주년이 되는 뜻 깊은 2014년을 맞이하여, 알렌의 내한과 관련해 그 동안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일차 사료들을 심도 있게 분석한 것이다.
알렌이 의료 선교사로 지원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알렌은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독립성이 강한 성향을 가졌다. 둘째, 알렌이 다니던 델라웨어 장로교회는 해외 선교의 전통이 강했으며, 알렌은 특히 혼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셋째, 알렌이 다녔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의 영향이다. 넷째, 알렌은 대학교를 졸업한 후,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는 과정에서 스승이자 선배이며, 당대 최신의 의학 지식을 갖고 있었던 맥도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섯째, 알렌은 조용히 뒤에서 내조하는 메신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다음으로 알렌이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883년 9월 1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알렌은 부인의 심한 배 멀미로 요코하마를 거쳐 10월 11일 상해 도착한 후, 임지인 지난푸로 가지 못하고 난징 및 상하이에 체류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푸의 헌터가 사임을 번복함으로한 선교지부에 2명의 의료 선교사가 근무하게 될지도 모르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더욱이 헌터는 1883년 12월 14일 열린 산둥-베이징선교부의 회의에서 한국행을 지원했지만 다른 선교사들과 선교본부의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임하지 않고 더욱 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1884년 1월 7일 상하이로 옮긴 알렌은 자신의 장래에 관해 고민하는 가운데, 친밀하게 지내던 핸더슨 의사가 그에게 외국인 의사가 필요한 서울로 갈 것을 적극 권유했다. 그리하여 알렌은 6월 6일 한국 세관의 하스에게 외국인 의사가 필요한지를 문의했고, 6월 9일자로 선교본부에 한국행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서울의 미국 공사관에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알렌은 한국행을 포기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며칠 후 선교본부로부터 그의 한국행을 허락하는 전보가 도착했다.
알렌의 한국행은 엘린우드가 결정한 것이었으나, 9월 8일 열린 선교본부 실행위원회에서 이를 인준함으로써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부’가 탄생하였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알렌의 성장 과정과 선교사 지원
Ⅲ. 미국 북장로회의 중국 선교 상황
Ⅳ. 알렌의 중국에서의 활동과 내한 과정
Ⅴ.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참고문헌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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