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한제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75
발행연도
2014.9
수록면
5 - 59 (55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묘지명은 장속의 변화에 따라 나타난 葬具의 하나이다. 여러 장구들 가운데 墓碑와 墓誌銘은 가장 유사한 것이다. 물론 묘비가 紀功의 성격이 강하고, 묘지명은 標識의 성격이 강하지만 묘지명 문학이 난숙기에 들어선 당대, 특히 당후기가 되면 그 서술상의 구별은 그리 크지 않다. 묘지명은 曹魏시대 禁碑令 선포의 영향으로 묘 앞의 묘비가 묘속에 들어감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묘지명의 사회적 유행과 관련하여 필자가 남달리 관심을 가졌던 것은 강남 남조의 여러 왕조보다는 중원 북조의 왕조에서 크게 유행한 이유와 수?당대에 와서 묘지명과 묘비가 병존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필자는 前稿에서 묘지명은 금비령 반포이후 碑의 대체 장구로서 남조에서 먼저 출현했지만, 예제와의 합치되지 않는다는 인식의 영향으로 발달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반면 북조에서는 동진-남조처럼 금비령이 반포된 적이 없었지만, 유목민족의 고유의 장속인 즉 虛葬, 潛埋습속과 농경 한족의 碑銘 문화가 합쳐져 묘지명이 활발하게 유행하게 되었다고 추론하였다. 아울러 본고에서는 한대이후 당말까지 중국에서 발굴된 묘비와 묘지명을 계량적으로 시대별로 비교해 본 결과 한대(특히 後漢)가 墓前 葬具와 碑石의 시대라고 한다면, 동진-남조도 이 전통을 계승하였으며(물론 帝室의 墓葬文化에 한정), 北朝는 묘지명시대이고, 수?당시대는 묘비-묘지명 병존시대라는 결론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울러 묘지명이 북조-수?당시대에 유행하게 된 것은 유목민족의 葬俗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조에서는 위에서 보았듯이 묘비는 제실 구성원(太子?太子妃 이상)에게만 허용된 것이었고, 素族[귀족사대부])에게는 묘지명만이 허락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예제에 맞지 않는 묘지명이 별로 선호되지 않았다. 아울러 남조 제왕의 능묘에서는 묘지명 대신 哀策이 들어가고, 그 외 鎭墓文이나 買地券 등이 납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북조[특히 북위]에서는 사회적 등급에 따른 묘지명 크기 등에 대한 규정을 발견할 수 없으나 발굴된 현물을 볼 때 규정이 있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아울러 수대에 이르면 장구 등에 대한 신분별 규정이 명확하게 등장한다. 다만 묘지명의 경우 묘비와는 달리 자의성이 보다 강하기 때문에 그런 규정이 준수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묘지명의 사료적 가치는 제작 이후 이차 가공이 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높지만, 자의성이 강한 만큼 기존사료에 근거해서 이용해야 한다. 특히 묘비보다도 과장의 정도가 더 심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葬俗과 葬具
Ⅲ. 墓碑 · 墓誌銘의 形制와 流行
Ⅳ. 墓誌銘의 資料的 價値
Ⅴ. 小結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5-910-002731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