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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성락 (목포대학교) 김민근 (민족문화유산연구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8권 제2호
발행연도
2015.11
수록면
7 - 40 (34page)
DOI
10.17068/lhc.2015.11.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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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곽분은 대체로 4세기 중 후반 가야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5세기대에 축조된 초기 석곽분의 분포는 크게 서남해안지역과 영산강 중상류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서남해안지역의 석곽분은 바다에 접하고 있어 서로 공통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반면 영산강 중상류지역의 석곽분은 좀 더 발달된 형태로 축조되었다.
석곽분의 기원은 선사시대의 무덤과 연결시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증명할 고고학 자료가 없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백제계, 왜계, 가야계 석곽과의 관련성을 강조하면서 외부로부터의 유입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영산강유역 초기 석곽분은 어느 한 지역의 특징만으로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 주민들의 이주에 의한 축조로 볼 수 없다. 따라서 5세기 전엽경 한반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영산강유역의 재지세력들은 새로운 형태의 무덤인 석곽분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초기 석곽분의 존재를 통해 영산강유역 고대문화에 대한 인식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즉 영산강유역에서는 석곽분이 먼저 유입되었고, 뒤이어 석실분이 축조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동안 영산강유역에서 옹관고분의 존재가 워낙 강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사실은 쉽게 인지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한 5세기대 영산강유역의 고대사회는 지역별로 다른 형태의 고분이 만들어지고 있어 옹관고분 축조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통합된 사회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석곽분의 연구성과와 쟁점
3. 영산강유역 초기 석곽분의 검토
4. 석곽분의 등장과정과 그 의미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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