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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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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문서학회 古文書硏究 古文書硏究 제41권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25 - 59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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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慶尙道 慶州府의 屬縣으로 존재하다 1637년 분리된 慈仁縣의 復縣 과정과 이를 둘러싼 자인현과 경주부 사족들의 동향을 살펴본 것이다. 속현을 비롯한 鄕ㆍ所ㆍ部曲 등의 任內는 점진적인 중앙집권화 정책에 따라 고려중기 이래 일련의 정비 작업이 지속되었는데, 이중 속현은 16세기 이전 대부분 정비가 완료되어 주읍으로의 승격, 통폐합 등의 방향으로 위치조정이 이루어졌다. 나머지 속현도 조선후기까지 주읍의 面里로 개편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었기에, 1637년 자인현의 복현은 조선시대 행정구역 개편과 관련하여 특이한 사례로 주목할 수 있다. 자인현 복현과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복현 과정에서 파생된 각종 자료들이 남아 있어, 당시 두 고을 사족들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전기까지 광범위하게 임내의 정비가 이루어졌으나 자료의 한계상 당시 주읍과 임내 고을 구성원의 입장은 규명할 수 없었다. 이와는 달리 자인현 복현 사실은 地理誌類에 산견되며, 특히 慶州李氏 楊月門中에는 그 과정에서 작성된 각종 古文書類가 남아 있어 두 고을 사족들의 입장을 살펴 볼 수 있다. 자인현의 복현은 크게 세 단계로 전개되는데, 첫 번째 움직임은 16세기 후반, 자인현을 경주부로부터 분리시켜 인근 慶山縣 또는 大邱府와 합속시키려는 시도였다. 두 번째 움직임은 1630년대에 있었던 복현 시도로, 1637년 이를 윤허 받게 된다. 세 번째는 고을 북쪽에 위치한 仇史部曲을 합속시켜 자인현의 北面으로 편성하려는 움직임이다. 이상의 복현 과정에서 두 고을 사족들 간에 이론이 분분하였지만,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단연 賦稅 문제였다. 자인현의 부세는 주읍인 경주부가 관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불합리함이 발생하게 되었다. 더구나 자인현은 다른 경주부의 임내와는 달리 경주부 사족과의 연고가 거의 없는 속현이었기에, 그 정도가 더욱 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자인현의 사족들은 주읍으로부터의 분리를 추진하였으며, 경주부 사족들은 유향소와 관권을 통해 이를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자인현이 복현을 추진하게 된 원동력은 지역 사족들의 성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6세기 이래 형성되기 시작한 자인현 사족들은 鄕校 활동과 임란 의병 활동 등을 매개로 지역 여론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장을 배경으로 자인현 사족들은 부세의 불합리에서 탈피하고, 주읍의 간섭에서 벗어나 향권을 독자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복현을 추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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