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학학회 동학학보 동학학보 제59호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221 - 262 (42page)
DOI
https://doi.org/10.46639/kjds.2021.59.7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고창 무장기포지(茂長起包址)는 1894년 무장포고문이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 한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가문화재(사적)의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 고 있다. 그 이유는 무장기포지의 정확한 위치와 범위가 설정되지 못했기 때 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장기포지의 정확한 위치와 범위를 확인하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따르면 전봉준 등이 무장에서 큰 집회를 열고 포고 문을 발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취어(聚語)」의‘무장동학배포고문(茂長 東學輩布告文)’ ,「나암수록(羅巖隨錄)」의‘무장동도포고문(茂長東徒布告文)’ ,「동학문 서(東學文書)」의 ‘전라도동학배포고문무장현(全羅道東學輩布告文茂長縣)’,「동비토 록(東匪討錄)」의‘동학배본읍포고문무장(東學輩本邑布告文茂長)’ 등의 표현에서 무 장에서 동학농민군들이 포고문을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 다면 무장포고문를 발표한 무장기포지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무장기포 지는 현재 행정구역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당산마을) 앞에 위치하 고 있다.「수록(隨錄)」에 기록된 무장현감 조명호의 보고에서 동학농민군이 무장 동음치면 당산 땅에 모였고, 그 당산마을 앞 평지에 동학농민군이 집결하 였음이 확인된다. 무장기포지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기준은 당산마 을 앞 평지라는 것과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 그리고 수천여 명이 5 일간 머물렀다는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이곳 당산마을 앞에 머무르면서 훈련 을 하고, 무기를 모았으며, 이후 모여 백산으로 출발하였다. 동학농민군은 단 순히 모여 출발한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동안 머물러 생활을 했던 것이다. 당 산나무가 있던 곳도 동학농민군의 활동했던 공간에 포함되었을 것이며, ‘수구 막이’ 나무가 있던 곳이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며, 장검이 출토된 위 치도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보면 당산마을 앞에서 모래사장이 있었던 구암천 변에 이르는 공간이 무장기포지의 범위라 고 할 수 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