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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원준 (인천대학교)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44호
발행연도
2023.6
수록면
133 - 170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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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국학회와 공독운동의 지도자였던 저명한 사회활동가 왕광치는 1920년 4월에 유학길에 오른 후, 1923년 무렵부터는 음악 연구에 매진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러한 ‘변신’은 자못 어색해 보이기도 하지만, 매우 달라 보이는 두 가지 활동에는 중요한 공통분모가 있었다. 그가 일찍부터 강조해왔던 ‘소년중국’의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에 필요한 ‘預備工夫’가 바로 그것이다. 그가 꿈꾸었던 ‘소년중국’은 ‘국내적 强權’과 ‘국제적 强權’으로부터 모두 ‘해방’된 세계였다. 이러한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과 ‘互助’에 기초한 단체생활, ‘학술연구’와 ‘교육’, ‘실업’ 등을 통한 ‘문화 부흥’과 ‘생활 개조’가 이루어져야 했다. 왕광치는 당시 중국에 필요한 것은 특정 이념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預備工夫’라고 생각했다. 공독운동과 신촌운동이 ‘국내적 강권’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預備工夫’였다면, 중국음악 연구는 ‘국제적 강권’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預備工夫’였다. 왕광치는 중국음악 연구를 통해서 ‘中華民族’의 민족문화를 새롭게 부흥시킬 수 있고, 이를 통해서 민족적 자각을 도모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왕광치는 당시의 많은 청년 무정부주의자처럼, ‘국가’를 부정하면서도 ‘민족’은 긍정했다. 그가 구상한 ‘소년세계’는 ‘중화민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자유로운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왕광치의 공독운동과 음악 연구는 모두 ‘소년중국’의 실현을 위한 ‘預備工夫’의 두 갈래 길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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