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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지영 (경운대)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68
발행연도
2012.12
수록면
101 - 13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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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原高句麗碑〉 전면 7행 하단의 일간지는 ‘十二月卄三日甲寅’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나 비문의 마멸이 심해 ‘卄五’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2000년 고구려연구회의 공동판독 결과 전면 1행은 ‘高麗太王祖王’이 명확해짐에 따라 비가 건립된 시기가 문자왕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따라서 일간지를 ‘十二月卄三日甲寅’으로 본다면 506년이 되고, ‘十二月卄五日甲寅’으로 본다면 496년이 된다. 그런데 496~497년 사이 우산성을 두고 나?려 간의 전쟁이 일어난 사실이 주목된다. 이 전투를 계기로 하여 삼국의 국제 정세는 큰 변화가 나타났다. 줄기차게 이어지던 고구려의 신라공격이 중단되었고, 신라와 백제의 군사적 공조활동은 전개되지 않았다. <중원비>가 이러한 대외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5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는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불안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점차 고립되면서 국가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반면 신라는 5세기 말 나제 동맹군의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면서, 고구려의 집중공세를 막아내는 데 한계가 생겼다. 더구나 언제든 적국으로 등을 돌릴 수 있는 백제도 예의 주시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삼국의 국제정세 속에서 나?려 양국은 우산성 전투를 기점으로 和議를 체결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화의를 통해 신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중단하게 되었으며, ‘本高句麗郡縣’으로 불리던 계립령 및 죽령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게 되었고, 고구려는 우산성을 확보하고 남방의 경계를 안정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백제는 나?려가 우호관계로 전환하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급히 탄현에 목책을 설치하여 신라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비문의 判讀과 建碑 시기
Ⅲ. 비문에 나타난 羅·麗 관계
Ⅳ. 5세기 말 政勢變化와 羅·麗의 和議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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