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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병훈 (영남대학교)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한국학연구 제57집
발행연도
2016.6
수록면
221 - 274 (5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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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후기 서원의 위상 변화를 경주 옥산서원 사례를 통해 확인해보려는 것이다. 옥산서원은 도산서원과 더불어 조선후기 영남을 대표하는 서원으로서 여타 서원들에 비하여 사회적 위상이 매우 높았던 곳이다. 이러한 관심은 1839년 강당인 ‘구인당’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확인이 된다.
사액현판의 소실로 재사액을 요구하는 논의가 道內에서 일어나 그해 11월에 왕명에 의해 賜額이 내려지고, 이어서 12월 13일에 致祭가 거행되었다. 이처럼 조정에서 재사액을 명하고, 그와는 별개로 치제를 행한 것은 중앙정부에서도 옥산서원이 영남을 대표하는 서원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옥산서원의 확고한 영남지역내의 위상은 강당을 중건한 후의 낙성식에서 경상감사와 경주부윤을 비롯한 인근 고을의 수령들이 대거 참석하고, 유생 만여 명이 참석한 백일장이 시행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17세기 초반 회재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정인홍의 상소 이래로 경상우도의 남명학파와의 관계는 멀어져서 강당 중건시에도 경상우도 사림의 협조는 확인되지 않는다. 즉 당시 옥산서원의 영향력은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대구 · 현풍을 중심으로 한 중부권에 국한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19세기 이전 옥산서원의 위상
3. 구인당 중건과 경주부 및 도내의 동향
4. 옥산서원의 再賜額과 致祭를 통한 위상 정립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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