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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병훈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저널정보
한국서원학회 한국서원학보 한국서원학보 제11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25 - 183 (5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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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서원 제도가 도입되던 초창기에 건립되어 대원군의 원사 훼철 시에도 존치되었던 곳으로서 한국 서원의 변천사를 대표하는 곳 중의 하나이다. 옥산서원은 건립 당시부터 경주지역 수원(首院)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위상은 제향인의 위상과 사액의 유무를 기본으로 정해진다. 여기에 사회・정치적 기능, 경제적 기반, 출판・도서관적 기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옥산서원은 이러한 요소가 시기별로 상호작용하면서 그 위상이 부침을 거듭하였지만 경주지역 수원으로서의 지위는 변함이 없었다. 옥산서원은 문묘 종사 대현인 이언적을 제향하는 서원으로서 경주부윤과 향인, 후손, 문인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건립되었다. 또한 건립 직후 사액이 되면서 국학에 준하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건물과 장서를 온전히 보존하였던 옥산서원은 전란 이후 경주지역을 대표하는 교육기관으로서 위치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거재와 거접 등의 강학을 강화하면서 유생 교육의 중심처로 위치하였다. 당시는 당쟁이 심화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제향된 이언적이 당색과 무관한 인물이었으며, 서원의 운영 방향도 당쟁과 거리를 두면서 당색을 불문하고 많은 인사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또한 지방관의 방문도 계속 이어지면서 옥산서원의 사회적 위상이 제고되는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경주부내의 당파간 신분간 분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으면서 18세기부터는 경주부 남쪽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편 문중서원의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서원 운영에 참여하던 원유들의 이탈로 서원 운영에도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각종 규정을 제정하고, 원임의 선발 범위를 경주부 전역으로 확대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시도하였으나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정조의 즉위 이후 이언적의 학문에 대한 국왕의 관심이 커지면서 그를 제향한 옥산서원에 대한 관심도 함께 커져갔다. 그 결과 인조반정 이후 단절되었던 치제가 재개되고, 서적의 하사도 이어지면서 옥산서원의 위상이 제고되었다. 이때부터 옥산서원은 도산서원과 더불어 영남의 양대 서원으로 위치하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서원 운영의 어려움이 더욱 심화되면서 원장의 선발도 도내로 확대하고 후손들의 서원 참여율도 더욱 증가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헌종 5)의 구인당 화재로 서원 재정은 악화되었지만 재사액과 국왕의 특명에 따른 치제가 거행되면서 서원의 위상은 재정립되는 효과를 얻었다. 그 후 원장에 경주부윤이 천망되면서 서원 운영에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서원 운영의 핵심가문인 경주손씨와 학문연원 시비가 발생하면서 19세기 중반 이후 손씨들이 옥산서원에서 완전히 이탈하였다. 나아가 신향들의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시비도 격화되어갔다. 그러나 대원군의 원사 훼철에도 존치되면서 더욱 위상이 높아져서 1884년(고종 21)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를 주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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