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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호민 (가톨릭관동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9권 제1호
발행연도
2016.5
수록면
319 - 344 (26page)
DOI
10.17068/lhc.2016.05.19.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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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9월부터 11월 중에 발생한 삼척군 원덕면 임야측량사건은 면민들이 일제가 주민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공산(公山)에 대한 소유구분을 대부분 국유림으로 분류한 것에 대한 항의였다. 김두혁 등 주민들은 경계표식의 재설치를 요구하며 저항을 확산하였다. 또 그는 인근 각 마을에 통문을 보내 항의를 독려하였고, 결국 인근 마을에서도 재조사 및 재측량 그리고 경계 표식의 재설치를 요구하는 저항이 일어났다.
1914년 11월 11월 임야조사 당국은 주민설명회 개최를 명목으로 삼척군민들의 요구사항을 뒤 엎어 버리려 하였고, 이를 인식한 주민 천 여명은 공용의 사유림 확보를 위한 강한 의지를 표방하며, 총독부 촉탁직원 본간을 구타 · 살해하였다.
이 사건 이후 원덕면 일대의 임야조사 방법은 변경되어 측량기사, 보조원, 헌병대를 대동한 채 2~3명의 입회권자만을 참석시킨 가운데 임야조사 사업을 마무리하는 한편, 폭력사태를 주도하였던 김두혁 등 27명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고 이중 3명은 무죄를 선고 받았으며, 24명은 중형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일제는 주민들과의 계약서와 기존 경계표식 설치는 없었던 일로 방침을 정하고, 강압적 수단을 동원하여 국 · 사유 임야의 구분과 경계표식을 다시 설치하였다.
일제가 원덕면 일대 임야조사에 공을 들인 까닭은 이 일대의 산림의 상태가 양호하고, 동해라고 하는 항만의 여건을 고려하여 산림 자원의 약탈이 용이하였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일제는 덕산항 축항시설의 확충, 원덕면과 근덕면을 잇는 임도의 개설 등을 통해 삼척군 궁방산, 원덕면과 근덕면 일대에서 본격적인 산림 수탈을 단행하였다.
원덕면 임야측량사건은 형태, 규모,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 등으로 보아 단순한 임야의 소유권만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의 저항이 아니었다. 일제는 목재 외에도 광산채굴권 확보를 통한 지하자원의 반출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철저한 임야의 소유 구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삼척군민들의 저항은 일제의 임야정책에 대한 폭력적 항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하자원 약탈을 방지하려는 목적성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사유림 축소를 위한 일제의 임적조사
3. 임야 경계측량에 대한 면민들의 대응과 저항
4. 산림자원의 반출과 수탈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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