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빨리 성전(Pāli tipiṭaka)과 그 주석서들(aṭṭhakathā)에 나타난 불교미학을 구원론적으로 접근해보려는 시도이다. 일부 학자들은 불교가 염세적이고 금욕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미학적 감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미학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붓다와 아라한과 같은 성자들(ariya-puggala)은 아름다움을 알지도 음미할 줄도 모른다는 통념도 지배적이다. 비록 이러한 견해는 얼핏 매우 설득력 있게 생각되지만, 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잘못된 일반화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적 즐거움(kāma-rāga)을 여윈 성자들은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음미하며 관능적 연상이나 자기 투시적 관념들에 물들지 않은 즐거움을 이끌어낸다. 빨리 성전과 그 주석서들에는 정신적으로 완벽한 성자들의 미학적 감정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들이 아주 많다. 붓다는 미학적 대상(subha-nimitta)들에 탐욕이나 감각적 욕망을 일으켜 미학적 감성이 관능주의(sensualism)나 쾌락주의(epicureanism)로 변질되는 것을 매우 경계하면서도 자연적이고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음미할 줄 아는미학적 감성을 배양하는 일이야말로 완벽한 인격체 즉 이상적인 인간형을 이루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붓다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의 제자들이 종교적 진리와 소통하고 미학적 감정을 고양시키는 매개체로 아름다움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인도하였다. 그의 제자들도 미학적 대상들을 대할 때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를 통해서 자신들의 미학적 감정을 종교적 감정(saṃvega)으로 승화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테라와다 아비담마는 우리가 미학적 대상들을 인식하는 과정(vīthi-citta)에서 선한 자와나(javana)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불교미학은 미학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불교미학은 열반(涅槃, nibbāna)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자극할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생명력과 구원론적인 의미를 얻는다. 그러므로 불교미학은 진․선․미가 하나로 합치하는 이상적 경지 즉 열반에 대한 추구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I. 들어가는 말II. 불교미학에 대한 부정적 견해III. 성자들의 미학적 태도IV. 미학적 감정에서 종교적 감정으로V. 나가는 말
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46호(2016.03) pp. 17∼44
구원론적 관점에서 본 불교미학: 빨리 성전과 그 주석서들을 중심으로김한상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강사devamitta@hanmail.net
요약문
본 논문은 빨리 성전(Pāli tipiṭaka)과 그 주석서들(aṭṭhakathā)에 나타난 불교미학을 구원론적으로 접근해보려는 시도이다. 일부 학자들은 불교가 염세적이고 금욕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미학적 감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미학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붓다와 아라한과 같은 성자들(ariya-puggala)은 아름다움을 알지도 음미할 줄도 모른다는 통념도 지배적이다. 비록 이러한 견해는 얼핏 매우 설득력 있게 생각되지만, 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잘못된 일반화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적 즐거움(kāma-rāga)을 여윈 성자들은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음미하며 관능적 연상이나 자기 투시적 관념들에 물들지 않은 즐거움을 이끌어낸다. 빨리 성전과 그 주석서들에는 정신적으로 완벽한 성자들의 미학적 감정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들이 아주 많다. 붓다는 미학적 대상(subha-nimitta)들에 탐욕이나 감각적 욕망을 일으켜 미학적 감성이 관능주의(sensualism)나 쾌락주의(epicureanism)로 변질되는 것을 매우 경계하면서도 자연적이고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음미할 줄 아는
미학적 감성을 배양하는 일이야말로 완벽한 인격체 즉 이상적인 인간형을 이루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붓다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의 제자들이 종교적 진리와 소통하고 미학적 감정을 고양시키는 매개체로 아름다움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인도하였다. 그의 제자들도 미학적 대상들을 대할 때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를 통해서 자신들의 미학적 감정을 종교적 감정(saṃvega)으로 승화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테라와다 아비담마는 우리가 미학적 대상들을 인식하는 과정(vīthi-citta)에서 선한 자와나(javana)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불교미학은 미학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불교미학은 열반(涅槃, nibbāna)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자극할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생명력과 구원론적인 의미를 얻는다. 그러므로 불교미학은 진․선․미가 하나로 합치하는 이상적 경지 즉 열반에 대한 추구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주제어불교미학, 구원론, 종교적 감정(saṁvega),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위티찟따(vīthi-citta), 자와나(javana)
I. 머리말
미학(美學, aesthetics)은 보통 자연․인생․예술이 지닌 아름다움의 본질과 이를 음미하는 인간의 감성을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로 정의되고 있다. Audi, Robert. The Cambridge Dictionary of Philosoph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pp.11-12.
한편으로는 ‘느림의 미학’, ‘쇼핑의 미학’, ‘절제의 미학’, ‘기다림의 미학’처럼, 일상 언어에서 미학은 아름다움(beauty)이나 예술(art)과 혼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원래 미학이란 용어는 일본에서 서양 문화가 유입되었을 때 만들어진 번역어이다. 이마미치 도모노부(今道友信), 조선미 옮김, 동양의 미학 (서울: 다할미디어, 2005), p.7.
서양에서는 1734년 독일의 알렉산더 고틀립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 1714∼1762)에 의해, 진리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학문인 논리학에 대해 미학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적 인식의 학문으로서 ‘에스테티카(aesthetica)’라는 라틴어로 철학의 한 부분에 설치된 것이 그 시초이다. 사사키 겡이치(佐々木健一), 민주식 옮김, 미학사전 (서울: 동문선, 2002), p.27.
그래서 미학이라는 학문은, 미(美, beauty)가 진(眞, truth)이나 선(善, good)과 구별되며 예술은 과학이나 도덕과 구별되는 고유한 가치의 활동으로서 하나의 독립된 영역을 이루고 있다는 가정 아래 성립된 근대적 사고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불교는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ā) 또는 현상계(saṅkhāra-loka)를 초월하여 영원한 평화와 지복의 경지인 열반(涅槃, nibbāna)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붓다는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유위법을 꿰뚫어 보는 지혜(慧, paññā)를 얻어야 한다고 누누이 가르쳤다. 즉 무상(無常, anicca)․고(苦, dukkha)․무아(無我, anattā)․부정(不淨, asubha)이라는 유위법의 네 가지 실상들을 영원하고 즐겁고 자아이고 깨끗하다고 여기는 전도된 인식(顚倒想, vipallāsa-saññā)에서 무명(無明, avijjā)이 비롯되기 때문에 지혜로서 그러한 전도된 인식과 무명을 타파하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여러 수행 방법들 가운데는 부정수행(asubha-bhāvanā) 또는 부정상(不淨想, asubha-saññā)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육체에 대한 탐욕(rāga)을 끊어내기 위해서 몸의 32가지 부위들과 썩어가는 시체와 같은 부정의 명상주제들(asubha-kammaṭṭhāna)을 관찰하는 수행을 말한다. 이러한 수행 방법은 신체적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세간의 통념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출가자들에게 노래나 춤 등과 같은 오락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승원의 규율도 있다. 빨리 성전(Pāli tipiṭaka) 테라와다의 전통에서 성전(聖典) 즉 캐논(canon)은 기본적으로 숫따 삐따까(Sutta-piṭaka), 위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 아비담마 삐따까(Abhidhamma-piṭaka)의 삼장(三藏, ti-piṭaka)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K.R. Norman(1997), pp. 131-148과 김한상(2015) 참조.
의 한 장르인 아비담마(abhidhamma)는 관습적 일상용어(vohāra-vacana)들로 표현되는 경의 용어들이 보다 철학적이고 엄밀한 용어(paramattha-vacana)들로 대체되는 고도의 철학적․심리학적 가르침이다. 아비담마에는 어떠한 문학적 장식이나 인물의 등장이나 일화나 개인적 논의도 뒤섞여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무미건조한 가르침이다.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불교가 미학적 감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미학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진(眞)과 선(善)은 적극적으로 모색하지만 미(美)는 폄하한다거나, 불교에서 미학이란 일종의 형용 모순으로서 그 자체가 난센스(none-sense)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붓다와 아라한과 같은 성자들(ariya-puggala)은 아름다움을 알지도 모르고 음미할 줄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세간의 통념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관점은 미학이 세속의 영역에서 아름다움과 개인의 실험적 창의성을 추구하고 종교는 출세간의 영역에서 성스러움과 보편적 신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미학과 종교를 다르게 보는 관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본 논문은 빨리 성전과 그 주석서들(aṭṭhakathā)에 전승되어온 미학과 관련된 내용을 재구성함으로써 이러한 주장과 관점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불교미학을 구원론(soteriology)의 관점에서 정립해보고자 한다.
II. 불교미학에 대한 부정적 견해
스리랑카의 미술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난다 켄티쉬 쿠마라스와미(Ananda Kentish Coomaraswami, 1877~1947)는 그의 저서 쉬바의 춤:14가지 인도 에세이들(Dance of Śiva: Fourteen Indian Essays)에서 불교는 전적으로 추상적인 철학이나 심리학이기 때문에 미학적 표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Coomaraswami, Ananda Kentish. The Dance of Śiva: Fourteen Indian Essays (New York: The Sunwise Turn, Inc., 1918), p.24.
또한 불교에서 아름다움과 개인의 사랑은 무상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피해야 하는 유혹이며, 위나야(vinaya)의 규제로 인해 미학이 오락으로 폄하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일반적으로 빨리 불교(Pāli Buddhism)에서는 우빠니샤드에서도 다른 것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러한 진리에 대한 열정이 승원의 제도와 결합되어 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강한 비난이 나타난다. 아름다움과 개인의 사랑은 덧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피해야 하는 유혹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불교에서 미학은 철저하게 향락으로 치부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Ibid., p.19.
아난다 켄티쉬 쿠마라스와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초기 불교는 예술을 철저하게 향락으로 치부한다. 초기 불교가 시나 드라마나 음악을 통해서 그 독특한 사상들을 표현하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 것처럼, 조각과 회화가 세속적인 목적과 효과를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예술은 육체적 쾌락으로, 아름다움은 유혹으로 각각 간주되었다. Ibid., p.46.
그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위숫디막가(Visuddhimagga)와 위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의 기술들을 예로 들었다. 먼저 그가 인용한 위숫디막가의 구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마치 아들을 좋아한 나머지, 아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보모를 크게 존중하듯이, 중생들은 형색 등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맛들인 뒤에, 느낌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형색 등의 대상을 공급하는 화가, 음악가, 향수 제작자, 요리사, 베 짜는 자, 연금술사, 의사 등을 크게 존중한다. 그러므로 이 갈애는 모두 느낌을 조건으로 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Vism. p.568, “Yasmā pan’ime sattā, puttaṃ assādetvā putte mamattena dhātiyā viya, rūpādi-ārammaṇa-vasena uppajjamānaṃ vedanaṃ assādetvā vedanāya mamattena rūpādi-ārammaṇadāyakānaṃ cittakāragandhabba- andhikasūdatantavāyakvejjādīnaṃ mahā-sakkāraṃ karonti, tasmā sabbā p’esā vedanāpaccayā taṇhā hotī ti veditabbā.”
그러나 붓다고사(Buddhaghosa)의 이러한 기술은 미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범부(凡夫, puthujjana)의 보편적 성향을 문제 삼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가 아름다운 자연이나 예술품을 보았을 때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주지하듯이, 불교는 감수 작용 즉 느낌(受, vedan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게 부정한다면, 이는 데이비드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 1933~2014)의 지적대로 인간성의 파괴와도 같을 것이다. Kalupahana, David J. A History of Buddhist Philosophy: Continuities and Discontinuities(Hawaii: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2), p.74 다만 붓다고사는 우리가 미학적 대상들에 감각적 즐거움이나 탐욕을 일으킴으로써 미학적 감정이 ‘관능주의(sensualism)’나 ‘쾌락주의(epicureanism)’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붓다는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āsikara)를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그러면 이제 아난다 쿠마라스와미가 인용한 위나야 삐따까의 또 다른 구절도 살펴보자.
비구들이여, 남자와 여자의 형상을 벽에 그려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하면 악작(惡作)이다. 비구들이여, 화만, 넝쿨, 황새치이빨, 시렁의 그림만을 허용한다. Vin.II, p.152, “na bhikkhave paṭibhānacittaṃ kārāpetabbaṃ itthirūpakaṃ purisarūpakaṃ. yo kārāpeyya, āpatti dukkaṭassa. anujānāmi bhikkhave mālākammaṃ latākammaṃ makaradanta-kaṃ pañcapaṭṭhikan ti.”
상기 금지 조항은 출가자들의 미학적 감정이 감각적 쾌락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지 위한 조치라고 보아야만 한다. 오히려 불교는 종교적이고 교화적인 목적의 그림이나 조각을 장려하여 왔다. 다시 말하면, 불교도들은 자신들의 미학적 감성과 종교적 믿음을 불교 예술을 통해서 표현해왔다. 아슈바고샤(Aśvaghoṣa)와 마뜨리쩨따(Mātṛceṭa)와 같은 불교시인들은 문학작품들을 통해 불교를 전파하는데 이바지했다. 만약 불교가 전적으로 이지적인 가르침만을 내세우고 세간의 예술을 향락이나 오락으로 폄하하여 거부했다면 지금과 같이 지역과 민족과 계급을 초월한 세계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III. 성자들의 미학적 태도
우리가 붓다와 아라한과 같은 성자들의 미학적 태도를 고찰해본다면, 불교미학을 이론화하는 작업에 어떤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붓다의 일생 그 자체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미학과 불교가 서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붓다는 데와다하(Devadaha)라는 아름다운 산림공원에서 태어났으며, 보리수 아래에서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였으며, 사슴이 노닐고 꽃이 만발한 미가다야(Migadāya)에서 처음으로 설법하였으며, 두 그루의 살라 나무 아래에서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에 들었다. 게다가 붓다는 누구보다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찬미하였다. 데이비드 칼루파하나는 그 증거들로 깨닫기 전의 자연 환경에 대한 붓다의 애정, 아름다운 자연 환경에 대한 붓다의 인식, 그리고 붓다가 자연 환경에 대해 표현한 존경과 감사를 들고 있다. Kalupahana, David J. “Buddhist Approach to the Environment Problem”, Buddhist Approach to Environment Crisis: UNDV Conference Volume (Thailand: The International Buddhist Conference on the United Nations Day of Vesak Celebrations, 2009), p.4.
붓다는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의 「마하빠리닙바나 숫따(Mahāparinibbāna-sutta)」에서 비구들과 함께 고대의 아름다운 탑(cetiya)들이 있는 웨살리(Vesāli)를 방문하였을 때 다음과 같이 아난다(Ānanda)에게 자신의 미학적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였다.
아난다여, 웨살리는 아름답구나. 우데나 탑도 아름답고, 고따마까 탑도 아름답고, 삿땀바까 탑도 아름답고, 바후뿟따 탑도 아름답고, 사란다다 탑도 아름답고, 짜빨라 탑도 아름답구나. DN.II, p.118, “Ramaṇīyā Ānanda Vesālī, ramaṇīyaṃ Udenaṃ cetiyaṃ, ramaṇīyaṃ Gotamakaṃ cetiyaṃ, ramaṇīyaṃ Sattambaṃ cetiyaṃ, ramaṇīyaṃ Bahuputtaṃ cetiyaṃ, ramaṇīyaṃ Sārandadaṃ cetiyam, ramaṇīyaṃ Cāpālaṃ cetiyaṃ.”
뿐만 아니라 붓다는 제자들에게도 미학적 감성을 계발하길 원했던 것 같다. 한때 라자가하의 거상(seṭṭhi)이 붓다가 정사를 받는지 여쭈자, 붓다는 그에게 아름다운 정사(vihāra)들을 짓고 배움이 많은 비구들이 입주하도록 분부하였다. Vin.II, p.147, “tasmā hi panḍito poso sampassaṃ attham attano vihāre kāraye ramme vāsayettha bahussute.” 마찬가지로 비구들은 정사의 바닥과 뜰을 쓸고 닦아서 정사를 아름답고 깨끗하게 유지해야 했다. Vin.II, p.152ff.
이는 붓다가 미학적 감정이 정사에 거주하는 출가자들의 수행을 도울 뿐만 아니라 정사를 방문하는 재가 신자들의 종교적 감정(saṃvega)을 고취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음을 말해준다.
주지하듯이, 미학은 우리의 감각 기관들 특히 눈과 귀를 통해서 어떤 대상을 지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유다 유다카(湯田豊), 권오민 옮김, 인도철학의 산책(下) (서울: 동국대역경원, 1991), p.159; Gnanarama, Pategama. Aspects of Early Buddhist Sociological Thought (Singapore: Ti-Sarana Buddhist Association, 1998), p.103.
지금까지 논한 것은 시각과 관련된 미학이다. 그러면 청각과 관련된 미학인 음악, 노래, 춤에 대한 붓다의 태도는 어떠하였을까? 붓다는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서 출가자가 듣기 좋은 가락을 탐하는 것을 막으려는 분명한 의도에서 노래(gīta)를 한낱 슬피 우는 것(ruṇṇam)으로, 춤(nacca)은 미친 짓(ummattakaṃ)으로 각각 폄하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성자의 율에서 노래하는 것은 슬피 우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성자의 율에서 춤추는 것은 미친 짓이다. 비구들이여, 성자의 율에서 이빨을 드러내놓고 지나치게 웃는 것은 유치한 짓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노래할 조건을 부수고 춤출 조건을 부수라. 그대들이 어떤 이유 때문에 즐겁다면 단지 미소를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AN.I, p.261, “Ruṇṇamidaṃ, bhikkhave, ariyassa vinaye yadidaṃ gītaṃ. Ummattakamidaṃ, bhikkhave, ariyassa vinaye yadidaṃ naccaṃ. Komārakamidaṃ, bhikkhave, ariyassa vinaye yadidaṃ ativelaṃ dantavidaṃsakahasitaṃ [dantavidaṃsakaṃ hasitaṃ (sī. pī.)]. Tasmātiha, bhikkhave, setughāto gīte, setughāto nacce, alaṃ vo dhammappamoditānaṃ sataṃ sitaṃ sitamattāyā’’ti.”
붓다가 출가자로 하여금 음악을 즐기지 못하도록 한 이유는 귀가 강력한 감각의 문(dvāra)이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kāma-rāga)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재가 신자는 우뽀사타(uposatha)를 맞아서 8계를 지키거나 명상센터에서 집중 수행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게 음악을 연주하거나 감상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가 예술과 음악 등의 미학적 활동을 부정한다는 통념은 그릇된 것이다.
오히려 붓다는 종교적 감정을 자극하는 음악과 노래를 몸소 칭찬하기도 했다. 어느 때 빤짜시카(Pañcasikha)라는 하늘의 음악가 즉 간답바(gandhabba)가 붓다를 찾아와 리라(lira)를 연주하면서 붓다와 법과 아라한을 칭송하면서도 수리야왓차사(Suriyavacchasa)라는 천녀(devī)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노래를 불렀다.
착한 여인이여, 태양과 같이 밝은 분이여, 그대의 아버지 띰바루에게 경배합니다.
나에게 기쁨을 주는 아름다운 그대가그분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중략)
아주 현명한 여인이여! 머지않아 꽃이 필 살라 나무처럼 아름다운그대의 아버지에게 경배하면서 귀의합니다.
그분의 이러한 딸을 위해서. DN.II, pp.265-267, “Vandetepitaraṃ bhadde Timbaru Suriyavaccase, Yena jāta si kalyāṇi ānanda-jananī mama. (중략) Sālaṃ va na ciraṃ phullaṃ pitaraṃ te sumedhase Vandamāno namassāmi yassa s’ etādisī pajā ti.”
이를 듣고서 붓다는 그를 외설(猥褻)적이라고 비난하기는커녕 이렇게 칭찬하였다.
빤짜시카여, 너의 리라 소리는 노랫소리와 잘 어울리고 너의 노랫소리는 리라 소리와 잘 어울리는구나! 그런데 언제 너는 붓다를 칭송하고 법을 칭송하고 아라한을 칭송하면서도 사랑이 가득 담긴 이 노래를 지었느냐? DN.II, p.267, “Saṃsandati kho te Pañcasikha tantissaro gītassarena gītassaro tantissarena, na ca pana te Pañcasikha tantissaro ativaṇṇati gītassaraṃ, gītassaro vā tantissaraṃ. Kadā saṃyūḷhā pana te Pañcasikha imā gāthā Buddhūpasaṃhitā dhammūpasaṃhitā arahantūpasaṃhitā kāmūpasaṃhitā ti?”
이는 붓다가 세속적인 사랑(kāma)이 출세간적인 깨달음과 연결된 점을 높인 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붓다는 미학적 감정이 종교적 감동으로 승화된 점을 찬탄한 것이다. 이점은 다음 이야기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 때 위사카(Visākhā)는 뿝바라마(Pubbārāma)라는 정사를 지어 승가에 헌납한 뒤에 기쁨에 겨워 정사를 돌면서 다섯 게송으로 된 노래를 불렀다. 비구들은 이러한 위사카의 행동을 보고서 붓다에게 그녀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보고하였지만 붓다는 그녀가 전생과 현생의 모든 소원을 이룬 성취감 때문에 감정이 고조되어 희열에 찬 노래를 불렀을 뿐이라고 해명하였다. Dhp-a.I, p.416f.
이러한 두 사례들을 볼 때, 붓다는 노래와 음악이 종교적 믿음이나 법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이를 반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붓다는 우리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여 감각적 쾌락을 일으키는 노래와 음악을 반대하였다.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Nikāya)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붓다는 무용가(naṭa)가 죽은 뒤에 빠하사라는 하늘(pahāsa nāma devā) 가운데 태어난다고 주장하던 연극단장(naṭa-gāmaṇī)인 딸라뿌따(Tālapuṭa)에게 무용가는 스스로 탐욕(貪, rāga)․성냄(瞋, dosa)․어리석음(癡, moha)을 여의지 못하고 중생들의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자극하기 때문에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빠하사라는 지옥(pahāsa nāma niraya)에 떨어진다고 설명한다. SN. IV, pp.306-307.
이는 붓다가 미학은 종교적 감정으로 승화되어야지 관능주의(sensualism)나 쾌락주의(epicureanism)로 빠져서는 안 된다고 보았음을 말해준다. 그러한 점에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현대적 소설, 픽션, 연극, 드라마, 영화, 오락 프로그램도 대부분 붓다가 경계하고 반대한 노래와 음악에 해당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테라가타(Therāgāthā)와 테리가타(Therīgāthā)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이러한 붓다의 훈시에 따라서 자신들의 미학적 감정을 종교적 감정으로 승화시킨 사례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자연의 오묘한 아름다움을 보고 읊은 사리뿟따(Sāriputta)의 게송이 바로 그러한 예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숲은 즐겁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곳에 살며 탐욕을 여읜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즐거움이 있으리. Th. 992게, “ramaṇīyā araññāni, yattha na ramatī jano, vītarāgā ramissanti, na te kāmagavesino.”
마하깟사빠(Mahā-kassapa)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의 미학적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였다.
까레리 꽃으로 뒤덮여 있는 시름없는 곳이 있네. 코끼리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이 아름다운 산악은 나를 즐겁게 하네.
시리고 맑은 물이 있으며, 인다고빠까 벌레가 가득한 곳, 푸른 구름 빛을 띤 이들 아름다운 바위산은 나를 즐겁게 하네.
푸른 구름 빛 봉우리, 마치 우아하고 높다란 궁전과 닮은, 코끼리 울음소리 들려오는 이들 아름다운 바위산은 나를 즐겁게 하네.
아름다운 산기슭에 비가 내리네. 선인(仙人)들은 종종 이곳을 찾네. 바위산에서는 공작이 소리높이 울고 있네. 이들 바위산은 나를 즐겁게 하네.
굳은 결심으로 선정을 닦으려는 나에게 이곳은 안성맞춤이네. 굳은 결심으로 목적을 이루려는 수행자인 나에게 이곳은 안성맞춤이네.
굳은 결심으로 평안한 경지를 얻으려는 수행자인 나에게 이곳은 안성맞춤이네. 굳은 결심으로 요가를 닦으려는 훌륭한 사람인 나에게 이곳은 안성맞춤이네.
구름에 덮인 하늘과 같이 삼꽃 옷을 둘러쓴, 온갖 새들이 살고 있는 이들 바위산은 나를 즐겁게 하네.
세상 사람들이 찾지 않고 사슴 떼만 오고 가는, 온갖 새들이 살고 있는 이들 바위산은 나를 즐겁게 하네.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널찍한 암반이 있으며, 검은 원숭이와 사슴, 그리고 물과 이끼로 뒤덮인 바위산은 나를 즐겁게 하네.
마음을 모아 도리를 바로 꿰뚫어보는 사람들이 느끼는 즐거움은 다섯 가지 악기로도 당해내지 못하네. Th. 1062-1071게.
깔루다이(Kāludāyi)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시를 지어 붓다에게 고향인 까삘라왓투(Kapilavatthu)를 방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거룩하신 분이시여, 이제 진홍빛으로 물든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열매를 맺으면서 화염을 일으키며 불타오르듯 찬란합니다. 거룩하고 당당한 분이시여, 지금은 가르침을 음미하며 즐겨야 할 때입니다.
아름다운 나무들은 꽃을 피워 사방에 널리 향기를 날리면서 잎을 떨구고 열매를 맺습니다. 당당하신 분이시여, 이제 길을 나서 행각해도 좋을 때입니다.
춥지도 않고 또한 덥지도 않습니다. 즐거운 계절, 여행에 알맞습니다. 당신이 서쪽을 향해 로히니 강을 건너시는 모습을 사까족과 꼴리야족이 볼 수 있도록 하소서. Th. 527-529게.
이 밖에도 붓다와 그 제자들의 미학적 감정을 엿볼 수 있는 사례들이 많지만 더 이상의 인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고대의 성자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음미하며 관능적 연상이나 자기 투시적 관념들에 물들지 않은 즐거움을 이끌어내었다는 점이다. Sandell, Klas. Buddhist Perspectives on the Ecocrisis (Kandy: BPS, 1987), p.16.
다시 말하면, 성자들의 미학적 감정은 향락이나 관능에 물들지 않는 순수한 정신을 특징으로 하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떠한 주관적 이미지나 욕망에 물들지 않을 때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붓다와 아라한과 같은 성자들의 미학적 태도를 고찰해본다면, 불교의 전통은 진․선․미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러한 영역들이 합치하는 이상적인 경지를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경지는 바로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최고로 계발하여 지혜(慧, pañña)와 연민(悲, karuṇā)을 구족한 상태인 열반이다. 그래서 불교가 염세적이고 금욕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미학적 음미도 결여하고 있으며, 미학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하는 주장은 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잘못된 일반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노래에 법을 적용시키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법에 노래를 적용시키는 것은 허용된다고 알아야 한다.” Khp-a.I, pp.36-37, “dammūpasaṃhitaṃ pi c’ettha gītaṃ na vaṭṭatī, gītūpasaṃhito pana dhammo vaṭṭatī ti veditabbo.” 라는 주석서의 설명에 주목해야 한다. 불교미학을 이론화하는 작업은 미학 그 자체보다 불교의 구원론적 이상을 먼저 생각하는 이 구절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IV. 미학적 감정에서 종교적 감정으로
붓다는 우리가 미학적 대상들에 탐욕이나 감각적 욕망을 일으켜 미학적 감성이 관능주의(sensualism)나 쾌락주의(epicureanism)로 변질되는 것을 매우 경계하면서도, 관능적 연상이나 자기 투시적 관념들에 물들지 않은 미학적 감성을 배양하는 일이야말로 완벽한 인격체 즉 이상적 인간이 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서, 붓다는 우리가 미학적 대상들을 단순히 음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원을 추구하는 자극제로 삼을 때만이 비로소 미학이 진정한 생명력과 구원론적인 의미를 얻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고차원의 미학적 감성은 빨리 성전에서 ‘삼웨가(saṁvega)’라는 용어로서 표현된다.
삼웨가는 saṁ(함께, 두루, 바르게)과 √vij(전율하다, 떨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서, 영국 PTS의 빨리․영어사전(Pāli-English Dictionary)은 ‘세간의 괴로움을 고찰하여 생기는 종교적 감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Rhys Davids, T. W. and Stede, W. ed. Pāli-English Dictionary (London: PTS, 1921-1925), p.658.
빨리 성전에서 삼웨가는 문맥 예컨대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에 대한 주석서인 수망갈라윌라시니(Sumaṅgalavilāsinī)는 태어남(jāti), 늙음(jarā), 병듦(vyādhi), 죽음(maraṇa)에 대한 두려움(bhaya)이 삼웨가(saṁvega)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Sv.III, p.984.) 이띠붓따까(Itivuttaka)에 대한 주석서인 빠라맛타디빠니(Paramattha-Dīpanī)는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악취에 태어나는 괴로움(apāya-gamanīya), 과거의 윤회고(atīte vaṭṭamūlakaṃ dukkha), 미래의 윤회고(anāgate vaṭṭamūlakaṃ dukkha), 현재의 윤회고(paccuppanne āhārapariyeṭṭhimūlakaṃ dukkha)의 여덟 가지 괴로움들을 ‘삼웨자니야 타나(saṁvejanīya ṭhāna)’라고 하거나, (It-a. pp.115-116.) 위숫디막가와 빠라맛타조띠까(Paramattha-jotika)는 ‘삼웨가 왓투(saṁvega-vatthu)’라고 하고 있는데, (Vism. p.135; Pj I. p.235.) 이 두 용어들은 모두 ‘삼웨가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토대’라는 뜻이다. 이럴 때의 삼웨가는 ‘절박감’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한편 붓다는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서 붓다가 태어나고 깨닫고 처음 법을 설하고 반열반에 든 네 장소들을 ‘삼웨자니야 타나(saṁvejanīya ṭhāna)’라고 말하고 있다. (AN.II, pp.120-121.) 이럴 때의 삼웨가는 ‘종교적 감정’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에 따라 약간 의미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종교적 감정’이라고 해석하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삼웨가는 인간의 미학적 감정이 종교적으로 승화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구원론적 관점에서 그것은 어떠한 중요성과 의의가 있을까? 독일 출신의 테라와다 승려인 냐나포니카 테라(Nyanaponika Thera, 1901~1994)는 그의 역작인 아비담마 연구: 마음과 시간에 대한 불교적 탐구(Abhidhamma Studies: Buddhist Explorations of Consciousness and Time)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특정한 위빳사나의 주제는 전통적인 명상의 주제들 속에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거나, 삶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건들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은, 옛 비구와 비구니들이 종종 읊은 대로, 매우 자극적인 내․외부의 체험들이거나 심지어 마음챙김과 분명한 앎(正念正知, sati-sampajañña)의 대상이 되는 일상의 아주 평범한 사건일 수도 있다. 만약 그러한 사건이 (전 실체를 이루는) 띠까(tika)나 두까(duka)로 된 아비담마 용어들 가운데 하나와 즉각적으로 연결된다면, 이것이 터트리는 충격파는 깊은 종교적 감정(saṁvega)과 통찰로 더욱 효과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Nyanaponika Thera. Abhidhamma Studies: Buddhist Explorations of Consciousness & Time (Boston: Wisdom Publications, 2010), pp.11-12.
냐나포니카 테라가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가 미학적 대상들을 대하고서 일으킨 미학적 감정이 종교적 감정으로 승화되는 것이 바로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는 불교미학의 의의이자 중요성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 미학과 불교미학과의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러면 빨리 성전과 그 주석서들에서 미학적 감정이 종교적 감정으로 승화된 구체적 사례들을 살펴보자.
담마빠다앗타까타(Dhammapadaṭṭhakathā)에는 빔비사라(Bimbisāra) 왕의 왕비인 케마(Khemā)의 이야기 Dhp-a.IV, p.57ff.
가 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너무 자만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체적 아름다움을 폄하하는 붓다를 친견할 기회를 요리조리 피했다. 하지만 이미 수다원과(須陀洹果, sotāpatti-phala)를 얻은 빔비사라 왕이 왕비를 걱정하여 시인들로 하여금 붓다가 있는 웰루와나(Veluvana)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시를 읊도록 하여 그녀의 미학적 감성을 자극하였다. 그렇게 웰루와나를 방문한 케마는 붓다의 옆에서 부채를 부치고 있는 한 아가씨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사실 그 아가씨는 붓다가 신통력(iddhi)으로 만든 환영(幻影)이었다. 그런데 케마의 눈앞에서 그 아가씨가 점점 나이가 들더니 결국에는 바닥에 쓰러져 죽는 광경이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서 아름다움도 결국 무상(無常, anicca)․고(苦, dukkha)․무아(無我, anatta)의 세 가지 특성(三相, ti-lakkhaṇa) 초기 불교에는 무상(無常, anicca)․고(苦, dukkha)․무아(無我, anattā)를 통괄적으로 부르는 명칭이 없다. 하지만 테라와다 불교는 이를 띠락카나(ti-lakkhaṇa)로 부르고 있으며, 북방의 대승 불교는 삼법인(三法印)이나 사법인(四法印)과 같이 법인(法印, dharma-uddāna)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테라와다의 띠락카나(ti-lakkhaṇa)와 대승의 법인(法印, dharma-uddāna)에 대해서는 김한상(2014), pp. 288-325 참조.
에 벗어나지 않음을 알게 된 케마는 곧바로 아라한과(阿羅漢果, arahatta-phala)를 얻었다.
빨리 문헌들 Ja.I, pp. 182–183; Dhp-a.III, pp.425-429; Pj II. pp.15-16.
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붓다의 상수제자(agga-sāvaka)이자 법의 장군(法將, Dhamma-senāpati)인 사리뿟따(Sāriputta)는 금세공사(suvaṇṇa-kāra)의 아들인 한 제자를 두고 있었다. 사리뿟따는 그에게 부정수행(asubha-bhāvanā) 또는 부정상(不淨想, asubha-saññā)을 닦도록 지시했지만 제자는 4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 이유는 제자가 과거 5백 생 동안 금세공사였기 때문에 더러움(asubha)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아름다움(subha)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붓다는 신통력으로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큰 연꽃이 솟아오르게 하고는 이를 제자가 응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붓다는 그 연꽃이 시들게 하였다. 이를 본 제자는 유위법의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성을 깨우치고서 아라한과를 얻었다. 붓다는 케마와 사리뿟따의 제자와 같이 미학적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에게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법을 해주기보다는 그들의 미학적 감정을 자극하여 ‘종교적 감정’으로 승화되도록 해주는 것이 정신적 진보를 이루는데 효과적임을 알았을 것이다.
붓다의 두 상수제자인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lāna)는 출가하기 전 각각 우빠띳사(Upatissa)와 꼴리따(Kolita)라는 바라문 청년이었다. 둘은 라자가하(Rājagaha)에서 매년 열리는 산마루 축제(Giragga-samajjā)를 관람하였으나 문득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무상을 절감하고 종교적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하여 둘은 구원(salvation)을 얻기 위해 출가를 감행하였다. Dhp-a.I, p.73f.; Mp.I, p.155ff 등.
위숫디막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풋사데와(Phussadeva)라는 비구는 마라(Māra)가 만든 붓다의 상(buddha-rūpa)을 보고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지닌 이것도 이렇게 빛나는데 모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여읜 세존은 얼마나 빛날까?’라고 붓다를 대상으로 희열(pīti)을 얻고 위빳사나(vipassanā)를 증장시켜 아라한과를 얻는다. Vism. p228, “So kir’āyasmā Mārena nimmitaṃ Buddharūpaṃ disvā: ayaṃ tāva sarāgadosamoho evaṃ sobhati. Kathaṃ nu kho Bhagavā [na] sobhati, [so hi] sabbaso vītarāgadosamoho? ti Buddhārammaṇaṃ pītiṃ paṭilabhitvā vipassanaṃ vaḍḍhetvā arahattaṃ pāpuṇī ti.”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Nikāya)에 대한 주석서인 사랏타빡까시니(Sāratthappakāsinī)에는 60명의 비구들이 논에서 벼를 수확하는 아가씨들이 부르는 종교적 감정으로 충만한 노래를 듣고서 아라한과를 얻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Spk.I, p.273, “magga-passe sassam rakkhantiyā Sīhaḷa-cetikāya Sīhaḷaken’ eva jāti-jarā-maraṇa-yuttaṃ gītakaṃ gāyantiyā saddaṃ sutvā, maggaṃ gacchantā saṭṭhi-mattā vipassa-kābhikkhū (c’ ettha) arahattaṃ pāpuṇiṃsu.”
이는 위숫디막가에 전해오는 다음 이야기와도 매우 유사하다. 스리랑카의 마하띳사(Mahā-tissa)라는 장로는 탁발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숲속 수행처를 떠나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로 가는 도중에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서 집을 뛰쳐나온 한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장로를 보자 요염하게 웃었다. 마하띳사는 그 여자를 쳐다보는 순간 이빨을 주시하였다. 장로는 그녀의 이빨을 봄으로써 부정상(不淨想, asubha-saññā)을 계발하고 아라한과를 이루었다. Vism. pp.20-21.
이는 부정상을 통해서 미학적 감정을 초극하여 구원을 얻은 사례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대상(subha-nimitta) 즉 미학적 대상들에게 일어난 미학적 감정이 그 보다 더 높은 고등 감정인 종교적 감정으로 승화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우리의 논의는 불교미학은 구원을 얻는 도구로서 활용될 때만이 진정한 생명력과 존재 가치를 지닌다는 당위적이거나 원론적인 수준에만 여전히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붓다는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답변하였다. 요니소 마나시까라는 요니소(yoniso)와 마나시까라(mānasikāra)의 합성어이다. 요니소는 yoni(모태)의 탈격(ablative case)으로 ‘근원적으로, 올바르게, 이치에 맞게’를 뜻하며, 마나시까라는 mano(마음)의 처격(locative)인 manasi와, √kṛ(하다, 만들다, 짓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 ‘마음에 만들기, 주의’를 뜻한다. 그래서 요니소 마나시까라는 글자 그대로 ‘근원적인 생각’을 뜻하며, 사물들의 표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은 면까지 꿰뚫어 보는 ‘사려 깊은 성찰’이나 ‘바른 주의’를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요니소 마나시까라는 유위법을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이고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반대말인 아요니소 마나시까라(ayoniso manasikāra)는 글자 그대로 ‘근원적이지 못한 생각’을 뜻하며, 사물들의 표면만을 보는 ‘사려 깊지 못한 성찰’이나 ‘그릇된 주의’를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위법을 영원하고 즐겁고 자아이고 깨끗한 것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Vibh. p.373, “여기서 무엇이 아요니소 마나시까라인가?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지혜롭지 못하게 주의하고, 괴로움을 즐거운 것으로 지혜롭지 못하게 주의하고, 무아인 것을 자아가 있는 것으로 지혜롭지 못하게 주의하고, 부정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지혜롭지 못하게 주의하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에 마음을 돌리고, 계속해서 돌리며, 인식하고 전향하는 것을 아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한다.” (Tattha katamo ayoniso manasikāro? Anicce niccan ti ayoniso manasikāro, dukkhe sukhan ti ayoniso manasikāro, anattani attā ti ayoniso manasikāro, asubhe subhan ti ayoniso manasikāro, saccavippaṭikūlena vā cittassa āvaṭṭanā anvaṭṭanā ābhogo samannāhāro manasikāro: ayaṃ vuccati ayoniso manasikāro.) 특히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서는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감각 기관들을 통해 맞부딪치는 현상들을 받아들여서 선(善, kusala)과 불선(不善, akusala)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마음작용(心所, cetasika)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는 자와나의 과정(javana-vīthi)에서 요니소 마나시까라를 적용하여 불선한 자와나(javana) 자와나(javana)에 대해서는 Bhikkhu Bodhi(2012), pp.149-178 참조.
가 되지 않고 선한 자와나가 되도록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니소 마나시까라를 지니고서 미학적 대상(subha-nimitta)들을 대할 때야만 비로소 미학적 감정은 종교적 감정으로 승화되고, 종교적 감성은 다시 유위법의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성을 꿰뚫어 보는 지혜로 연결될 수 있다. 반면에 요니소 마나시까라를 지니지 않고서 미학적 대상들을 감상한다면, 관능적 연상이나 자기투시적 생각들에 휘둘리기 쉽다. 이것은 미학적 대상들을 지혜 없이 주의하여(ayoniso manasikaroto) 감각적 욕망이 일어난 결과이다. 붓다는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서 그러한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비구들이여, 이것 이외에 다른 어떤 법에 의해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kāmacchanda)이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은 증장하고 드세어지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표상(subha-nimitta)이다. 비구들이여, 아름다운 표상을 지혜 없이 주의하여(ayoniso manasikaroto)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은 증장하고 드세어진다. AN.I, p.3, “Nāhaṃ bhikkhave aññaṃ ekadhammam pi samanupassāmi yena anuppanno vā kāmacchando uppajjati uppanno vā kāmacchando bhiyyo bhāvāya vepullāya saṃvattati yathaidaṃ bhikkhave subha-nimittaṃ. Subha-nimittaṃ bhikkhave ayoniso manasikaroto anuppanno c’eva kāmacchando uppajjati uppano ca kāmacchando bhiyyo bhāvāya vepullāya saṃvattatī ti.”
비구들이여, 이것 이외의 두 가지 조건은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게 한다. 어떤 것이 둘인가? 아름다운 표상(subha-nimitta)과 지혜 없는 주의(ayoniso manasikara)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은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게 한다. AN.I, p.87, “Dve’me bhikkhave paccayā rāgassa uppādāya. Katame dve? Subhanimittañ ca ayoniso ca manasikāro. Ime kho bhikkhave dve paccayā dve paccayā rāgassa uppādāyā ti.”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미학적 감정이 감각 대상들과 감각 기관 그리고 마음의 세 가지가 서로 만나서 일어나는 ‘접촉’ 즉 ‘팟사(phassa)’로부터 일어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번뇌들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한 범부는 접촉(觸, phassa)에서 일어나는 느낌에 갈애(愛, taṇhā)를 일으킨다. 그러면 갈애는 선업(kusala-kamma)이나 불선업(akusala-kamma)을 짓게 하는 취착(取, upādāna)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12지 연기(十二支緣起, dvādasaṅga-paṭiccasamuppāda)에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이다. 반면 붓다와 아라한과 같은 성자들은 미학적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본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미학적 대상들도 다른 유위법들과 마찬가지로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를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ñāṇa-dassana)’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똑같은 미학적 대상들을 놓고 성자와 범부가 취하는 태도의 차이점이다. 비록 어떠한 성위(聖位, ariya-phala)도 얻지 못한 범부라 할지라도 성자와 같은 미학적 태도를 취하려면 요니소 마나시까라를 배양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미학적 대상들을 인식하는 과정 즉 ‘위티찟따(vīthi-citta)’ 인식 과정(vīthi-citta)에 대해서는 Bhikkhu Bodhi(2012), pp.149-178 참조.
에서 믿음(saddhā), 자애(慈, mettā), 연민(悲, karuṇā) 등과 고등 감정들을 일으키느냐 아니면 관능적 연상이나 자기 투시적 생각들을 일으키느냐는 전적으로 요니소 마나시까라의 적용 여부에 달려 있다.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에 대해서는 Nina Van Gorkom(2009), p.92, (2010), p.146과 Bhikkhu Anālayo(2012), pp.193-204 참조.
요약하면, 불교는 미학적 감정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것이 종교적 감정 즉 삼웨가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필요하다고 본다.
V. 나가는 말
재가 신자들의 종교적 믿음을 고취시키고 철학적이고 난해한 불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불교 예술이 지대한 역할을 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가 사찰이나 성당과 같은 종교적 성소들에 들어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고요해지고 경건해지는 것은 이러한 종교적 성소들이 풍기는 성스러운 분위기와 아름다움 때문이다. 성자들의 청명한 안색이나 고요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법(法, dhamma)에 대한 믿음(saddhā)을 고무한다. 예를 들면, 사리뿟따는 앗사지(Assaji)의 밝은 얼굴 표정과 고요한 모습에 감동을 받은 것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직접적 동기였다. Vin.I, p.41.
인도의 아쇼까(Aśoka) 왕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도 니그로다(Nigrodha)라는 사미의 거룩한 모습을 우연히 보고 감동한 데서 비롯되었다. Sp.I, p.45.
또한 32대인상(三十二大人相, dvattiṃsa-mahāpurisa-lakkhaṇāni)을 갖춘 불상과 같은 불교 예술품들을 보거나 빨리어 독송을 들으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미학이 종교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방증한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옷토(Rudolf Otto, 1869~1937)는 이를 ‘누미노제(numinose)’라고 표현했다. 누미노제는 인간이 거룩한 존재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진실로 피조물임을 존재론적으로 통감하는 미학적 감정을 말한다. 이와 같이 그는 종교 현상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 관념에 익숙한 신학자들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 애썼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의 시원은 종교적 경험과 깊이 연루되어 있으며, 최초의 예술은 주술과 종교 의례 가운데 노래, 춤, 그림 등의 혼합된 복합체로서 미지의 세계에 대응하는 삶의 한 방식으로서 잉태되고 태어났었다. 장미진, 「불교미학의 기초개념 연구 시론」, 미학․예술학연구 제25집 (서울: 한국미학예술학회, 2007), p.25.
그러한 점에서 예술과 종교는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융합하면서 하나의 총체적인 문화를 형성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경향은 종교와 철학과 예술 등을 분리해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던 동양의 전통에서 특히 강하긴 해도 말이다. 누군가는 미학이 세속의 영역에서 아름다움과 개인의 실험적 창의성을 추구하고 종교는 출세간의 영역에서 성스러움과 보편적 신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미학과 종교를 다르게 보기도 한다. 불교는 진(眞)과 선(善)은 적극적으로 모색하지만, 미(美)는 폄하한다거나, 불교에서 미학이란 일종의 형용 모순으로서 그 자체가 난센스(none-sense)라는 통념도 바로 이러한 이분법적 시각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미학과 종교는 모두 절대성과 초월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절대성과 초월적 가치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양자는 과학의 영역과도 구분된다. 이러한 예술관은 특히 서양의 낭만주의자들(Romanticists)에 의해 옹호되었는데 그들은 예술이 시․공간적 한계를 초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예술의 본질은 작품 안에서 존재의 진리가 스스로를 정립하는 것이다.” Heidegger, Martin. Off the Beaten Track (edited and translated by Julian Young and Kenneth Hayn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p.16.
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그는 예술을 미적 기교나 기술 등과 관련시키던 입장에 반발하면서 이를 진리와 연관시켰다. 이처럼 절대성과 초월적 가치를 향해 있다는 점에서도 미학과 종교는 공통점을 지닌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예술을 감상할 때 단순히 아름답다는 느낌 이상의 종교적 감동과 성스러운 느낌을 경험한다. 형식은 다르지만 예술과 종교는 모두 인간성을 고양하는 정신 활동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래서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가 지적한 대로, 미학과 종교는 마치 자기들의 내면적 관계를 의심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관계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두 친한 친구들과 같이, 서로 나란히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Schleiermacher, Friedrich. 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134.
이는 불교미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다른 인도 철학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전통은 종교․윤리․ 철학․미학 또는 진․선․미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러한 영역들이 합치하는 이상적인 경지를 추구하였다. 그러한 경지는, 붓다와 아라한과 같은 성자들이 모범적으로 보여주듯이,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최고로 계발하여 지혜(慧, pañña)와 연민(悲, karuṇā)을 구족한 상태인 열반이다. 그리고 이 열반은 현상계 즉 유위법의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성을 꿰뚫어 봄으로써 얻어진다. 열반이야말로 불교가 추구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이자 불교미학의 궁극적 지향점이다. 붓다는 미학이 완전한 인격체를 이루는 도구로서 사용되어야만 그 진정한 가치와 생명력이 발휘된다고 믿었다. 즉 아름다움이 종교적 감정(saṃvega)을 자극하여 보다 높은 삶인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를 살도록 고무할 때만이 비로소 미학이 진정한 생명력과 구원론적인 의미를 얻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미학은 진․선․미가 하나로 합치하는 이상적 경지 즉 ‘열반에 대한 추구’와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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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oteriological Approach to Buddhist Aesthetics: A Study Based on the Pāli Canon and its Commentaries Kim, han-sang Lecturer, Department of Buddhist Studies at Dongguk University The present paper is a soteriological approach to Buddhist Aesthetics as described in the Pāli Canon (Pālitripiṭaka) and its commentaries (aṭṭhakathā). Some scholars are of the opinion that Theravāda Buddhism, being pessimistic and ascetic in outlook, is devoid of any kind of aesthetic appreciation and has very little to do with Aesthetics. And it is commonly believed that the Buddha and the arahants never perceived nor appreciated beauty. Although this view may at first appear to be very convincing, this is in fact far from the truth and is no more than a mistaken generalization. The Noble Ones (ariya-puggala) who purged themselves of sensual pleasures (kāma-rāga) appreciated beauty for its own sake and derived joy unsullied by sensuous associations and self-projected ideas. There are numerous episodes in the Pāli Canon and its commentaries which reveal aesthetic admiration in men of high spiritual attainment. Although the Buddha warned that aesthetics could turn into sensualism or epicureanism if we had attachment or sensual desire for the beautiful objects (subha-nimitta), he regarded that cultivating aesthetic appreciation unsullied by sensuous associations and self-projected ideas is essential for making perfect humans and attaining Nibbāna. The Buddha on several occasions directed the attention of his disciples to beauty in order to communicate religious truths and as a medium ennobling aesthetic appreciation in them. His disciples also ennobled their aesthetic appreciation into religious emotion (saṃvega) by having ‘wise attention (yonisomanasikāra)’ when they contacted beautiful objects. In this connection, TheravādaAbhidhamma emphasizes that every effort should be made in order to develop wholesome javana in the noetic process (vīthi-citta). In Buddhist Aesthetics, aesthetics is not for its own sake. Only if it becomes an incentive for those who aspire to Nibbāna, then it obtains its true vitality and soteriological significance. Therefore, we can safely say that Buddhist Aesthetics is equivalent to an exploration of the ideal state where truth, goodness and beauty join together, which is Nibbā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