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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73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65 - 204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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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수,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 6군의 지역사적인 운동경험을 먼저 연구하여 밝힐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지역사적인 관점에서 여순사건을 밝히는데 소홀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순천지역을 중심으로 여순사건에 이르기까지 좌우세력의 동향을 살펴보고, 이들이 여순사건이라는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었으며, 그리고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중점적으로 탐색하였다. 해방 후 전면에 나타난 순천지역의 좌우세력은 일제시기 청년운동, 신간회 활동,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한 인물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순천지부는 우익세력이 주도하는 형태로 결성되었으며, 김양수를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이 한국민주당 순천지부를 결성하여 우익정치활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좌익 쪽에서는 노동조합평의회와 순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했다. 좌우익의 세력관계는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미군정의 한민당 우대정책, 강력한 물리력을 동반한 좌익탄압책으로 우익세력은 유리한 위치에서 좌익과의 대결을 펼치면서 지역사회를 주도해 나갈 수가 있었다. 또한 1946년 1월 21일 광복군이 청년동맹 급습하여 야기됐던 피살사건 이후 좌우대립이 심각한 형태로 전개됐으며, 1947년에 들어서 우익조직이 상당히 강화되었다. 좌익활동가들의 전향도 이어져 지역운동에도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5 · 10선거를 전후해서 순천지역의 우익세력이 분화되어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 한독당 세력, 한민당 세력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갑구와 을구로 나뉘어 치러진 순천지역의 선거에서 한민당 후보가 모두 패했다. 이는 순천지역의 반한민당 정서가 강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발생한 여순사건 당시 순천지역 좌익세력은 상당히 약화되어 있던 상태였으며, 남로당 순천군당은 봉기군을 통제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건의 전면에 자신들을 드러내놓고 활동을 전개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다수의 희생을 초래했다. 그런데 좌익세력이 무차별적으로 우익세력을 처단했다는 지금까지의 인식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 처형의 대표적인 사례로 양계원 순천경찰서장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48년 4월에 순천경호대를 결성하여 5개월 동안 훈련을 시켜 9월에 이르러 의용단으로 개편한 일로 지역민으로부터 반감이나 원성을 샀다. 정부군의 진압작전 과정이나 순천 탈환 후 봉기 가담자나 부역자 색출에서 무원칙적으로 무질서하게 처리함으로써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황두연 사건을 들 수가 있다. 황두연을 소장파로 분류하거나 이승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이러한 견해는 시정될 필요가 있다. 황두연 사건은 5 · 10선거에서 패배한 세력이 여순사건을 기회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상대편을 색깔론으로 공격하면서 야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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