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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승호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96호
발행연도
2024.7
수록면
215 - 235 (2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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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부여의 역사는 한국 역사의 여명기이자 출발점으로 간주되어 왔으면서도 정작 양자의 관계상에 대해서만큼은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연구사의 공백으로 남아있다. 물론 이는 양자의 관계를 밝 힐 사료적 근거가 전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과 부여의 관계를 해명하지 않은 채 한국사의 서장 을 하기는 어렵다. 이에 본고에서는 기원전 3~2세기 고조선과 부여의 대외정책 속에서 양자의 교차점을 탐색 해보고자 하였다. 국가 성립 이후 부여는 위만조선과 병존하면서도 조선과는 다른 대외정책 방향을 보였다. 위만조선은 성립 과 더불어 漢으로부터 外臣의 지위를 보장 받았고, 이를 통해 확보한 兵威財物을 앞세워 주변 濊族 사회에 대 한 패권적 세력 팽창을 기도하였다. 위만조선의 이러한 세력 확대는 주변 예족 사회를 긴장시켰을 뿐만 아니 라 한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기원전 128년 薉君南閭 집단 이탈과 기원전 109년 전쟁의 빌미로 작용 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세 변동 속에서 부여는 오히려 한의 대외정책에 적극 편승하면서 위만조선의 패권에 대응해 나갔다. 특히 부여왕권은 기원전 109년 한의 조선 침공 과정에 협조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기존 朝鮮王이 가졌 던 外臣王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한으로부터 濊王에 봉해지고 ‘濊王之印’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 다. 이를 통해 부여왕은 조선을 대신하여 예족 사회를 대표하는 지배적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한국사의 서막을 장식하였던 두 국가는 기원전 2세기 무렵 前漢과의 관계를 축으로 하여 예족 사회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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